세상 속으로 들어온 기하학의 모습
▲ 아카데메이아 학당은 기하학을 중시했다. 기하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기하학 원론'을 펴낸 유클리드 역시 아카데메이아 학당에서 공부했다.
(사진: Wikimedia)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곳에 들어오지 마라"
기원전 387년, 그리스의 철학자인 플라톤이 세운 아카데메이아 정문에 새겨진 문구다.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를 개설하고 각지 청년들을 모아 연구와 교육생활에 전념했고, 학교의 주요 교과목은 기하학과 산술(수의 이론)이었다고 한다. 플라톤은 기하학적 사고방식, 즉 논리적인 사고를 모든 학문의 기본으로 여겼다. 기하학을 알아야만 출입할 수 있는 교실에 대해 ‘이 무슨 역차별인가’라는 생각도 들 터. 하지만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에 각 분야 내로라하는 명사들도 동의했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코코 샤넬과 천재 화가 피카소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기하학적 사고방식으로 세상 곳곳을 바꿔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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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가 만든 놀라운 학문 분야
▲ 고대 이집트에 기원을 둔 기하학은 공간의 수리적 성질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다.
(사진: Pixabay)
대부분의 학문이 그렇듯, 기하학 역시 우연한 기회에 시작됐다. 고대 이집트에서 홍수로 나일강이 범람한 후, 토지를 적절하게 재분배하기 위해 측량을 사용했고 이것이 기하학의 시작으로 평가된다.
기하학을 의미하는 영단어 geometry가 토지를 뜻하는 geo와 측량을 뜻하는 metry를 합한 말이라는 점에서도 그 기원을 엿볼 수 있다. 즉 땅의 크기를 재는 방법에서 시작된 학문이라는 의미다. 이후 그리스 시대에 이르러 기하학은 공간의 성질, 모양과 크기, 도형의 개념, 물체의 상대적 위치를 연구하는 정교한 학문으로 발전했다. 플라톤의 생각처럼 기하학은 현재까지 자연과학은 물론, 인문과학이나 사회현상, 생산 기술, 경영 문제를 설명하는 데도 기하학적 사고가 사용되고 있다. 법률을 다룰 때도 기하학적 논증 방법이 필요하다. 드론, 자율주행차 무인이동 기술 등의 4차 산업혁명의 핵심 요소에도 기하학 원리는 빠질 수 없다.
▲ 2018년 평창올림픽 개막식엔 1218대의 무인비행체(드론)가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드론쇼 역시 3차원 공간 위 비행체의 위치를 결정하는 기하학 덕분에 가능한 일이다.
(사진: Intel)
2018 평창 동계 올림픽 개막식 하늘을 수놓은 드론 쇼 역시 기하학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공중에 띄울 드론의 수와 위치를 결정하기 위해 각 드론이 움직일 경로를 x축, y축, z축을 기준으로 하는 기하학적 분석을 토대로 설계해야 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사는 3차원 공간에 기하학이 이용되지 않는 곳은 없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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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폭에 담긴 기하학
입체파 천재 화가 '파블로 피카소', 근대회화의 아버지 '폴 세잔', 추상미술의 선구자 '피에트 몬드리안' 등 미술에 관심이 없어도 알 법한 유명 화가들의 그림에도 기하학이 담겼다. 이들은 모두 상상력의 마술사로도 불렸는데, 그들은 화폭에 보이는 것을 담지 않고, 알고 있는 것을 담았기 때문이다.
▲ 파블로 피카소의 [볼라르의 초상(2010년作)]은 입체적인 크리스탈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그림엔 공간을 크기, 모양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기하학적 사고가 담겼다.
(사진: 푸시킨미술관)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볼라르의 초상]은 2차원 평면 위에 그려졌지만, 마치 3차원의 입체적 크리스탈처럼 묘사한 점이 돋보인다. 그림은 유명한 미술상이자 비평가인 볼라르의 얼굴을 여러 조각의 면으로 나누어 표현한 작품이다. 뿐만 아니다. 피카소는 [화실(1928년作)]이라는 작품에서 가로선과 세로선, 사선을 반복적으로 사용해 기하학적 사고를 표현했고, 붉은 식탁보가 깔린 탁자 위의 과일 그릇을 기하학적 도형으로 나타내기도 했다.
▲ 폴 세잔의 대표 작품 [사과바구니(1894년作)]에서 알 수 있듯, 세잔은 둥근 사과처럼 구, 원형, 원기둥 등 기본적인 도형을 중심으로 세상을 관찰했다.
(사진 : 미국 시카고 미술관)
프랑스 화가 폴 세잔은 과일 중에서도 사과를 자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사과처럼 둥근 과일을 주로 그린 것 역시 기하학의 영향 때문이다. 그는 자연을 단순하고 기본적인 형태, 즉 통나무 같은 원기둥이나 구, 원뿔로 표현하려 했다. 그의 눈에 비친 자연은 단순히 기하학적인 모습이었는데, 둥근 사과나 오렌지 같은 과일은 이런 기하학적 형태에 가장 가까웠다.
▲ 피에트 몬드리안은 그의 작품 [꽃이 피는 사과나무(1912년作)]에서 나무를 검은 선의 조합으로 묘사했다.
(사진: 헤이그 시립 미술관)
네덜란드의 화가 피아트 몬드리안은 기하학적 사고를 가진 예술가의 ‘끝판왕’이라고 여길 수 있다. 그는 세상을 단순하게 관찰하는 것은 물론, 선과 선이 이뤄 만든 격자무늬로 세상을 바라봤다. [꽃이 피는 사과나무(1912년作)]에서 볼 수 있듯, 그는 나무인지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가는 선으로 추상적인 가로선과 세로선, 격자무늬를 표현했다. 이후 그의 후기 작품에서는 선과 직사각형을 기본으로 그림을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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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기하학에 물들다
예술가들의 기하학적 사고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자 하는 다른 분야까지 영향을 미쳤다. 16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는 사람의 몸을 직접 해부해 [인체해부도]라는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다. 또 패션 디자이너들은 기하학의 토대로 공간감과 독창성을 표현하며, 인체의 몸을 더욱 수려하게 꾸밀 패션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세계적 명장인 디자이너 코코샤넬 역시 "패션은 건축과 같다. 비율의 문제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샤넬의 말을 통해 유추해보자면, 그녀가 알고 있는 패션 지식은 공간에 관한 기하학이다.
▲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코코 샤넬(왼쪽)은 기하학이 패션 디자인의 근간에 있다는 말을 남겼다. 여성들의 로망으로 여겨지는 샤넬의 대표 핸드백 역시 그 정신을 담아 선과 네모난 도형 등을 갖춘 기하학적인 무늬로 해석할 수 있다.
(사진: Wikipedia, 샤넬 공식 홈페이지)
▲ 디자이너 브랜드 바오바오 이세이 미야케(바오바오)의 핸드백은기하학과 패션이 만난 대표 사례다. 바오바오는 실제로 이 작품에 '기하학 토트백'이란 이름을 붙였다.
(사진: 바오바오 이세이 미야케 공식 홈페이지)
패션에 물든 기하학은 원, 삼각형, 사각형 등의 절제된 명확성과 간결함을 기반으로 세련되고 모던한 이미지를 제공하고 있다. 후배 디자이너들 역시 샤넬처럼 기하학 패턴을 장식에 활용했다. 덴마크의 패션 디자이너 헨릭 빕스코브는 선명한 원색, 기하학적 무늬가 도드라지는 패턴 등으로 옷 속에 숨어 있는 사람 몸을 탐구한다. 점퍼 하나도 건축물을 지어 올리듯 질감이 서로 다른 섬유를 자르고 겹겹이 이어 붙여 부피감이 도드라지게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최근 유행을 끌고 있는 브랜드 '바오바오' 역시 삼각형의 패턴을 이어붙인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바오바오의 가방은 패턴을 기반으로 절반으로 접기도, 작게 구길 수도 있어 3차원 공간을 설명하는 기하학적 사고방식을 패션에 접목한 결과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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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쫓은 기하학이 초고층을 지배한다
▲ 중국 상해 세계금융센터(WFC)의 포탄을 맞은 구멍은 미(美)적 요소가 아닌, 기하학적 사고를 도입한 건축 기술의 결과다.
(사진: Wikipedia)
초고층 건물에도 기하학이 담겨 바람을 잡는다. 고층 건물의 표면을 평평하지 않은 기하학적 패턴으로 장식하면 바람이 스쳐 지나가게 할 수 있다. 바람의 세기는 땅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급격히 커지기 때문에 고층 건물 건설의 관건은 ‘바람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가령, 중국 상해에 세워진 세계금융센터(WFC)는 492m 높이 건물의 상층부에 축구경기장 절반 크기의 거대한 구멍을 냈다.
이러한 형상은 건축의 미적 요소가 아니라 바람에 저항하기 위한 공학적 판단의 결과다. 이 건물의 바닥은 마름모 형태를 띠는데, 이를 이용해 바람이 벽면을 타고 흘러나간다. 또 위로 올라갈수록 산 정상처럼 옆 부분이 깎여 있어 바람에 의한 충격을 줄일 수도 있다.
한편, 바람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 건물 모서리의 모양을 바꾸는 건축법도 있다. 일반적으로 건물 모서리에서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서 소용돌이 등이 많이 생겨 건물에 충격을 주기 때문이다. 성냥갑 같은 초고층 건물일 경우 네 모서리를 삼각형 또는 사각형으로 깎거나 얇은 판 같은 핀을 설치해 바람의 충격을 줄일 수 있다. 초고층 아파트도 건물의 모서리를 깎아 바람의 충격을 줄이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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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차원 공간의 근간에 '찬밥신세'라니
이처럼 기하학은 예술, 패션, 건축은 물론 인체와 세상을 이해하는 삼차원 공간을 해석할 수 있는 근간 학문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기하학이 '찬밥신세'를 받는 모양이다. 2021년 수학능력시험 수리영역 출제범위에서 기하학이 제외될 것이란 소식이 들려온다. 기하는 수학에서 가장 중요한 과목일 뿐 아니라, 세상을 공간적으로 이해하는 기본 정신임에도 말이다.
이에 대해 김선화 기초과학연구원(IBS) 기하학수리물리연구단 연구위원은 "기초에서 응용까지, 현대 과학의 발전에 있어 수학의 공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며 "기하학은 수학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분야"라고 설명했다. IBS 기하학수리물리연구단은 기하학 분야에서 세계가 주목한 연구 성과를 연달아 올리고 있다. 박지훈 부연구단장은 '파노(Fano) 다양체'라는 특이한 다양체 증명에 핵심적인 연구를 통해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파노 다양체는 대수기하학(수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도형을 연구하는 학문)에서 오랜 역사를 지닌 연구 대상이다. 현재 많은 수학 분야들 중 가장 복잡하고 발달된 분야 중 하나다. 그 중심에 파노 다양체가 있다. 박 부연구단장은 미국수학회 회고 논문집에 1990년대에 나온 3차원 파노 초곡면에 대한 가설을 담은 117쪽짜리 논문을 실었다.
▲ 박지훈 부연구단장(기하학 수리물리 연구단)이 미국수학회록에 게재한 논문 표지. 피노다양체와 관련된 10년 간 미제였던 문제를 해결해 큰 주목을 받았다.
(사진 : American Mathematical Society)
1990년 영국의 수학자 3인은 "95가지 3차원 파노 초곡면들은 일반적으로 비유리 공간일 것이다"라는 가설을 제시했다. 박 부연구단장은 미국수학회 논문을 통해 '모든 매끄러운 초곡면들이 비유리 공간일 것이다'라는 결론을 다시 내렸다. 기존의 정리에서 바뀐 단어는 단 한 가지, '모든'이라는 단어다.
일반인의 눈엔 큰 차이가 없는 결론일지도 모른다. 이 한 단어를 바꾸기 위해 박 부연구단장은 1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95가지 파노 초곡면들을 세세히 관찰했고, 영국 에딘버러대와 4년에 걸친 장기간 공동연구를 펼쳤다. 새로운 정리는 다양한 파노 다양체 증명에 널리 이용될 수 있도록 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실제로 지난해 이를 토대로 박 부연구단장은 대한수학회 논문상을 수상했다.
▲ 박지훈 부연구단장은 수학자들에게는 자유로운 사고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는 “젊은 연구자들이 더욱 자유로운 분위기속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즐거운 분위기를 조성하고자 한다”고 말한다.
(사진 : IBS)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이집트의 땅 측량부터, 피카소의 작품, 샤넬의 패션, 초고층건물 그리고 과학자의 최신 연구 현장까지 기하학은 기원전부터 현재까지 아주 긴 시간 동안 세상의 중심에 있다. 복잡한 세상이지만, 이를 간단하게 관측하고 정리해내기 위한 기하학은 어쩌면 바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도 필요한 사고방식 아닐까.
기초과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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