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평창동 영인문학관에서 이어령(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를 만났다. 호적상 85세다. 실제 한국 나이는 올해 87세다. 호적에 이름이 뒤늦게 올라갔다고 했다. 항간에 투병설이 있었지만 안색도 좋고, 표정도 밝고, 열정도 넘쳤다. 그에게 ‘이어령의 삶과 종교, 그리고 문명론’을 물었다.
이 교수는 문득 여섯 살 때 기억을 떠올렸다. 잊히지 않는 순간이라고 했다. “나는 굴렁쇠를 굴리며 보리밭 길을 가고 있었다. 화사한 햇볕이 머리 위에서 내리쬐고 있었다. 대낮의 정적, 그 속에서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부모님 다 계시고, 집도 풍요하고, 누구랑 싸운 것도 아니었다. 슬퍼할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 먹먹하게 닥쳐온 그 대낮의 슬픔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때는 몰랐지만, 그게 내게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였다.”
이 교수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과일 속에 씨가 있듯이, 생명 속에는 죽음도 함께 있다. 보라. 손바닥과 손등, 둘을 어떻게 떼놓겠나. 뒤집으면 손바닥이고, 뒤집으면 손등이다. 죽음이 없다면 어떻게 생명이 있겠나. ‘나는 살아있다’는 생명의식은 ‘나는 죽어있다’는 죽음의식과 똑같다. 빛이 없다면 어둠이 있겠나. 죽음의 바탕이 있기에 생을 그릴 수가 있다. 의사의 통보는 오히려 내게 남은 시간이 한정돼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이 교수는 방사선 치료도, 항암 치료도 받지 않는다. 석 달 혹은 여섯 달마다 병원에 가서 건강 체크만 할 뿐이다. 그는 ‘투병(鬪病)’이란 용어를 쓰지 않았다. 대신 ‘친병(親病)’이라고 불렀다. “듣기 좋아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서양사상은 영혼과 육체를 둘로 나눈다. 영혼을 중시하는 사람이 있고, 육체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다. 동양사상은 다르다. 영혼과 육체를 하나로 본다. 상호성이 있다고 본다. 의사가 ‘당신 암이야’ 이랬을 때 나는 받아들였다. 육체도 나의 일부니까. 그래서 암과 싸우는 대신 병을 관찰하며 친구로 지내고 있다.”
이 교수는 7년 전에 소천한 딸(이민아 목사) 이야기를 꺼냈다. 이 목사도 생전에 암 통보를 받았다. “암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 딸도 당황하지 않았다. 의사는 ‘수술하면 1년, 안 하면 석 달’이라고 했다. 딸은 웃었다. ‘석 달이나 1년이나’라며 수술 없이 암을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오히려 진단한 의사가 당황하더라. 그게 무슨 큰 도를 닦아서가 아니다. 애초부터 삶과 죽음이 함께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는 ‘뉴스’가 아니다. 그냥 알고 있던 거다. 그때부터 딸은 책을 두 권 쓰고, 마지막 순간까지 강연했다. 딸에게는 죽음보다 더 높고 큰 비전이 있었다. 그런 비전이 암을, 죽음을 뛰어넘게 했다. 나에게도 과연 죽음이 두렵지 않을 만큼의 비전이 있을까.” 그는 그게 두렵다고 헀다.
이 교수는 한국 사람은 그걸 연결하며 산다고 했다. “아기가 태어나면 우리는 안고 잔다. 포대기로 업고 다닌다. 최대한 엄마와 밀착하게 한다. 그게 뭔가. 엄마 뱃속의 환경과 이어주려는 거다. 산모가 미역국 먹는 나라도 한국뿐이다. 태중의 양수는 바닷물과 성분이 비슷하다. 과학은 생명이 바다에서 육지로 왔다고 말한다.” 반면 서양에서는 아기를 낳자마자 요람에 재운다. 다시 말해 엄마 뱃속, 자연과의 단절이다. “한국 문화에는 그런 요람이 없다. 그러니 ‘생명 자본’이 누구에게 가장 많겠나. 서양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다. 채집시대의 나물 문화를 바탕으로 정보시대의 선두까지 그대로 이어온 한국인에게 가장 많다.”
중앙일보
이 교수는 문득 여섯 살 때 기억을 떠올렸다. 잊히지 않는 순간이라고 했다. “나는 굴렁쇠를 굴리며 보리밭 길을 가고 있었다. 화사한 햇볕이 머리 위에서 내리쬐고 있었다. 대낮의 정적, 그 속에서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부모님 다 계시고, 집도 풍요하고, 누구랑 싸운 것도 아니었다. 슬퍼할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 먹먹하게 닥쳐온 그 대낮의 슬픔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때는 몰랐지만, 그게 내게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였다.”
이 교수는 손바닥을 내밀었다. “과일 속에 씨가 있듯이, 생명 속에는 죽음도 함께 있다. 보라. 손바닥과 손등, 둘을 어떻게 떼놓겠나. 뒤집으면 손바닥이고, 뒤집으면 손등이다. 죽음이 없다면 어떻게 생명이 있겠나. ‘나는 살아있다’는 생명의식은 ‘나는 죽어있다’는 죽음의식과 똑같다. 빛이 없다면 어둠이 있겠나. 죽음의 바탕이 있기에 생을 그릴 수가 있다. 의사의 통보는 오히려 내게 남은 시간이 한정돼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이 교수는 방사선 치료도, 항암 치료도 받지 않는다. 석 달 혹은 여섯 달마다 병원에 가서 건강 체크만 할 뿐이다. 그는 ‘투병(鬪病)’이란 용어를 쓰지 않았다. 대신 ‘친병(親病)’이라고 불렀다. “듣기 좋아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서양사상은 영혼과 육체를 둘로 나눈다. 영혼을 중시하는 사람이 있고, 육체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다. 동양사상은 다르다. 영혼과 육체를 하나로 본다. 상호성이 있다고 본다. 의사가 ‘당신 암이야’ 이랬을 때 나는 받아들였다. 육체도 나의 일부니까. 그래서 암과 싸우는 대신 병을 관찰하며 친구로 지내고 있다.”
이 교수는 7년 전에 소천한 딸(이민아 목사) 이야기를 꺼냈다. 이 목사도 생전에 암 통보를 받았다. “암이라는 말을 듣고 우리 딸도 당황하지 않았다. 의사는 ‘수술하면 1년, 안 하면 석 달’이라고 했다. 딸은 웃었다. ‘석 달이나 1년이나’라며 수술 없이 암을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오히려 진단한 의사가 당황하더라. 그게 무슨 큰 도를 닦아서가 아니다. 애초부터 삶과 죽음이 함께 있다고 생각한 사람에게는 ‘뉴스’가 아니다. 그냥 알고 있던 거다. 그때부터 딸은 책을 두 권 쓰고, 마지막 순간까지 강연했다. 딸에게는 죽음보다 더 높고 큰 비전이 있었다. 그런 비전이 암을, 죽음을 뛰어넘게 했다. 나에게도 과연 죽음이 두렵지 않을 만큼의 비전이 있을까.” 그는 그게 두렵다고 헀다.
이 교수는 한국 사람은 그걸 연결하며 산다고 했다. “아기가 태어나면 우리는 안고 잔다. 포대기로 업고 다닌다. 최대한 엄마와 밀착하게 한다. 그게 뭔가. 엄마 뱃속의 환경과 이어주려는 거다. 산모가 미역국 먹는 나라도 한국뿐이다. 태중의 양수는 바닷물과 성분이 비슷하다. 과학은 생명이 바다에서 육지로 왔다고 말한다.” 반면 서양에서는 아기를 낳자마자 요람에 재운다. 다시 말해 엄마 뱃속, 자연과의 단절이다. “한국 문화에는 그런 요람이 없다. 그러니 ‘생명 자본’이 누구에게 가장 많겠나. 서양도 아니고, 중국도 아니고, 일본도 아니다. 채집시대의 나물 문화를 바탕으로 정보시대의 선두까지 그대로 이어온 한국인에게 가장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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